가상과 건축, 그 가능성
건축 분야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건축물을 통한 혁신과 창의성을 추구하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을 것이다. 건축 분야에서 혁신과 창의성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도구와 기술의 가능성이 열리게 되면서 새로운 접근방식을 기대해 볼수도 있을 것이다.
펜데믹으로 사람들은 물리적 만남이라는 고정관념에서 해방되었고, 가상세계에서 삶을 이어나가는 것에 익숙해지려 한다. VR기기와 AI기술들의 발전속도를 볼때면 앞으로 예상했던것보다 빠른 속도로 가상과 현실의 경계는 더욱 흐릿해 질것이다.
건축은 공간에 가장 많이 의존하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 공간의 개념과 경계가 변화하려는 이 과도기에 건축을 어떤 식으로 변화할것인가?
- 건축에 종사하는 나는 어떤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것인가?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가상건축에 대한 관심을 가져왔다. 우연히 SNS를 통해 'MIDDAY' 라는 채널을 발견하였고 몇가지 질문을 통해 책을 추천받을 수 있었다.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가상건축에 대한 담론들을 알고자 한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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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해당 도서의 저자를 밝히고 싶다.
AAPK는 2018년에 만들어진 건축가 집단이며 건축 이론에 근거하여 디지털 매체를 통해 새롭게 형성되는 공간 개념을 탐구하는 장을 여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한다. 현재 AAPK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와 서울을 기반으로 4명의 구성원이 첫 번째 기수로 활동 중이며『가상-건축 Architecture as Fabulated Reality 』의 출간은 AAPK가 공식적으로 내딛는 첫 번째 활동이다.
책은 구성은 다음과 같다.
이 도서는 담론을 모아둔 전반부와 AAPK의 작업을 소개하는 후반부로 나뉘어있다.
전반부는 총 4개의 에세이와 하나의 인터뷰로 구성된다.
• 건물을 떠난 여행의 시작: 오늘날 건축은 어디로 가는가 – 정해욱
• 가상 현실의 지어낸 공간과 이야기들 – 요한 베툼
• 오늘날 건축을 만들어내는 것은 무엇인가 – 피터 트루머
• 이미지 야생 지대의 불모지 관리하기 – 마이클 영
• 기계 속의 가든: 건축 매체에 관한 이야기 – 다미얀 요바노비치
후반부는 동명의 전시 가상-건축에 전시될 예정이었던 AAPK 각 멤버들의 가상 현실 프로젝트가 담긴다.
• 가상-건축 Fabulated Reality – AAPK
• <Real-Time Chamber> – 고수영
• <Saturated Space> – 오연주
• <Third Space> – 이수남
• <Patched City> – 정해욱
실존하는 이 시대의 페이퍼 아키텍트
나는 건축을 제외한 다른 분야의 사람들과 깊게 대화한 적이 많지 않아 잘 모르지만 건축만큼 디자인에 관념을 투영하는 부분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분야가 있을까 싶다. 책에서도 이야기 하듯 '건물을 잘 짓는일' , '건물을 잘 디자인하는 일, '건축' 은 별개의 프로페셔널 이지만 사람들은 이 모든것을 한몸으로 인식하였고 아이디어를 쌓고 건물에 투영해보는 구조를 건축에서는 여전히 비일비재한것 같다. 하지만 모더니즘을 통해 그동안 건물로 투영되지 않고는 실존하기 어려웠던 건축이 글과 이미지 등에 기반한 매스미디어 자체로 실존을 증명하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포멀리즘을 이야기 하는데 건축이 자율적 형식 체계로 독립적 실존이 가능하다는 비전을 제시한다.
이것은 인스타와 핀터레스트를 통해 우리에게 이제 흔한일이 되어버렸다. 학생때의 어느 공모전중 페이퍼 아키텍쳐를 다룬적이 있다. 건축은 이제 실제 건물로서만이 아닌 매스미디어가 하나의 페이퍼가 되어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유투브란 매체를 통해서 관습적인 건축을 답습하려는 시도를 한것이 몹시나 후회가 된다. 그 때 다뤘던 미래의 오피스공간을 가상으로 옮기고자 한 의도 자체는 아직까지 가상건축으로서 유효한 생각이지만 공간의 구성 및 앞으로의 비전을 제시하는 방식에 있어 담론으로서 굉장히 어설펐다고 생각이 든다.
나는 인스타문화를 그리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러나 보여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시대가 되었고 그에 따라 건축 역시 실제 공간뿐만이 아니라 미디어에서 보여지는 그 자체가 오히려 실제보다도 더 가치있게 여겨지는 것에대해 부정할 순 없다. 물리적 실체가 있는 것과 물리적 실체가 없는 것 사이의 위계가 사라진 것이다. 책은 우리에게 이는 물질적 설계를 건축의 일부분으로 축소하며, 다른 측면에 대한 전문성을 건축가에게 요구 할 것이다 라고 이야기한다. 앞으로 가상을 맞이할 건축가로서 이 부분은 나에게 길을 제시해 주는 느낌이었다.
가상시대가 주는 질문과, 우리의 준비물
책은 우리에게 준비물을 2가지 제시하고 있다.
1. 이미지 시대가 변화시키고 창조해내는 가치 체계를 어떻게 포용하고 대응할 것인가?
2. 건축은 그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것인가?
글에서는 기존의 운명론적 형태론 및 유기적 형태등의 주장들에 대한 비판은 통쾌함을 불러낸다. 모더니즘이니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하는것은 항상 두루뭉술하게 다가온다. 자하하디드의 유기적 형태 또한 그것이 과연 옳은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인상적인 부분 몇가지를 나열해 보겠다. < 더보기를 클릭해 보자!!! >
-알고리즘 테크놀로지와 유기적 형태는 서로 상관이 없다. 그저 누군가의 상상에 의해 인위적으로 짜 맞춰진 조합이다, 누군가 자신의 미적 취향을 쫒기 위해 주어진 상황을 알리바이로 둘러댄 것이다.
-모더니스트들은 이면적으로 자신의 에스테틱 스타일을 추구해놓고서 그 형태가 기능을 따르다 보니 생긴 결과로 읽히길 희망한다. 로빈 에반슨은 르 코르뷔지에의 모듈러가 갖는 허무맹랑함, 르 코르뷔지에의 조형 욕망을 위한 핑계임을 지적한다.
-땅이 시키는 건축 같은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창작자가 자신의 조형 욕망을 설득시키기 위함이거나, 자신조차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때 의지하는 핑계이다.
-유기적 형태 패티시도 같은 맥락이다. 유선형 혹은 '하나의 면으로 연결된 형태를 철학과 테크놀로지로 포장했지만 사실 이것은 인간의 형태적 본능이자 당시의 유행에 불과했다.
-파라메트리시즘이 비교적 쉽게 유려함을 얻어내는 특성은 건축 디자인 행위를 '외형적 특이함' 이라는 피상적 관점으로 내몰았다. 요란한 형태를 얻어낸 다음' 디자인 좀 했다' 는 착각에 빠진다. 대중들의 유선형의 형태에 대한 미래적이다 라는 편견도 한몫한다.
나도 비슷한 관점으로 그동안 건축을 보아왔다. 저자가 제시하는 것 처럼 기존의 형태적 가치체계는 나에게 크게 와닿지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한 모든 형태에 대한 주장들은 시대가 만들어낸 앞으로의 건축으로 나아가는 초석임은 분명할 것이다. 저자의 2가지 준비물, 첫번째로 기존 가치체계에서 탈피할 것에 대한 요구, 그리고 두번째로 새로운 가치체계에 대한 질문에 대해 나는 계속해서 고심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새로운 건축의 여행은 이미 시작되었다.
후반부
후반부의 프로젝트들을 소개하고 싶다.
모든 내용이 아닌 인상적인, 그리고 시사하는 바 라고 생각하는 부분을 집중해서 다뤄보았다.
<Real-Time Chamber> - 고수영
건축의 암묵적 전통이었던 현재의 건축적 결과물이 과거의 건축행위로부터 비롯되어야만 만들어질수 있던 구조는 실시간 모드라는 새로운 테크닉 체제에서 변화된다. 건축행위의 과정에서 우리는 더이상 무언가를 표상할 필요없이 전달만 하면 된다. 우리는 표상의 종말의 시대로 다가서고 있다.
글을 통해 우리는 건축세계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드로잉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드로잉은 표상을 구축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하지만 드로잉의 선형-원근법을 생각해보면 소실점은 결국 보는 이의 위치를 강제로 고정해버리는 한계가 있다. 드로잉은 건축의 필수적인 구축 방식처럼 여겨져 왔지만 이것은 우리의 고정관념이자 향수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실시간 시뮤레이션의 매체는 이미지를 현재 시점으로 존재하게 하며 건축물을 구축한 사람과 참여하는 객체 모두를 실시간으로 매개한다. 또한 언제든지 수정돠고 다른 요소들이 개입될 수 있는 틈새를 허용한다. 보는 이는 구축된 현실 앞에서 자율성을 가질 수 있게 된다. 드로잉의 허점과 실시간 시뮬레이션의 보완관계가 몹시 흥미롭게 다가온다.
<Saturated Space> - 오연주
여기서도 드로잉의 한계에 대한 내용들이 담긴다. 드로잉은 기존의 목적과는 달리 실제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자체적인 리얼리티를 형성한다. 드로잉의 직각투영은 인간의 시각기준으로 보여지는 것을 담아내지 못하며 오히려 대상을 왜곡한다. 우리가 현상설계를 하며 메인 이미지들로 생산해내는 것들 역시 실제와 다르게 렌더링 렌즈를 바꿔가며 이미지적으로만 아름다워지는 것들을 채택하는 것을 우리는 이미 경험했을 것이다. (비례를 왜곡하거나, 특정 부분을 인위적으로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이유들로 드로잉의 미적 흥미로움은 오직 2차원안에서만 유효하다.
저자는 가상현실은 전통적 건축투영과 표상들이 새로운 리얼리티로 나아갈 수 있는 출구를 열어줄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디자인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것들도 평면 스크린 속에서 시각화 될 뿐이고 우리는 2차원 평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가상현실은 이러한 근본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Third Space> - 이수남
저자는 대안적 공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리적공간과 가상의 공간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일치를 통하여 구축될 수 있는 공간적 경험에 주목한다. 인간은 공간 속에서 자기 신체의 움직임을 바탕으로 자신의 시각적 사전 지식과 촉각, 청각 등의 사전 지식들을 즉각적으로 연결-추론하는 과정을 통해 공간에 대한 지각을 완성한다.
Third Space는 세가지 질문에서 출발한다.
1. 진짜 real 처럼 인지되는 것은 무엇인가?
2. 표상과 실제는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
3. 공간은 어떠한 방식으로 지각되는가
물리적 공간안에서 실제와 표상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매체를 통하여 공간과 공간사이에 각기 다른 감각의 불일치를 배치하여 대안적 공간의 경험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하는 실험이었다.
흥미로운 부분은 결국 가상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은 우리의 모든 지각 방식들을 뒤흔들어 놓을것이고, 이러한 과정 가운데 새로이 나타나고 적립되는 공간 패러다임이 분명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그것들을 찾아나가는 과정중에 있는 듯하다.
<Patched City> – 정해욱
마지막 프로젝트는 저자의 이야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렘쿨하스의 정크스페이스를 언급하며 도시의 형태적 특질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 하는데, 추측하자면 도시의 임시방편적 특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다.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서울맵’을 생각해보자 도시 전체가 사실적인 매스들로 모델링되어있는 것 같지만 실상 가까이 확대해보면 임시방편적으로 억지로 기워져있는 것을 확인할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도시공간이 이러한 임시방편적 형태특질을 바탕으로 도시의 요소들을 추출하고 그것으로 다시 새로운 풍경을 만든다고 하는데 솔직히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프로젝트의 자세한 이해를 원하는 사람은 이 책을 꼭 읽어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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